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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격동의 세계 정세 위에 놓여있던 한반도와 한국민 …
한반도의 사람들은 한반도의 운명을 과연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가?

1945년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기쁜 해였다.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8월부터 불길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반도 남과 북 양쪽에 미·소군이 각각 진주한데 이어 38선이라고 하는 생소한 말이 생겨났다. 곧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12월에 열린 모스크바3상회의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기쁨의 1945년도 잠시, 이 해는 사람들에게 분노의 해로 기억되며 끝이 났다.

1946년은 충돌의 해로 기억되었다. 미소관계가 악화되고 좌우대립이 격화되었다.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이 주최한 신탁통치반대 궐기대회는 현장에서 갑자기 모스크바3상회의 지지대회로 바뀌었다. 이것은 조선공산당의 자주성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시작하자마자 대립이 터져나와 기약 없이 무산되었다. 9월에는 대규모 스트라이크가 발생했다. 좌익이 총파업을 벌인 것이다.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영남지역 전반의 유혈폭등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한 이승만과 김구, 맥아더(좌측)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우측)


왜 한국은 이렇게 충돌과 대항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는가? 혹시 우리가 그 때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으면 분단의 고착화를 면할 수 있었을까? 좌익과 우익이 그처럼 치열하게 충돌하지 않았다면 통일이 되었을까? 이런 질문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남북분단의 주된 원인은 우리가 자치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민족 내부의 분열 때문도 아니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도 종속변수에 불과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주에서의 사태가 한반도 통일의 가능성을 봉쇄한 것이다. 만주에서의 사태변화로 인해 설령 스탈린이 한반도의 통일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음에서 그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자.

 

중국 내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귀중한 전략적 요충지로 더오른 북한,
스탈린의 소련이 미국과 승부짓는 과정의 관건으로 등장하다

 

1928년부터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에 돌입했다. 1921년 창설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통일전선을 구축하다가 1928년 장시(江西)소비에트를 건설하였다. 이를 국민당군은 5차례의 작전 끝에 몰아내었고, 장시지구에서 탈출한 공산당은 1934년부터 대장정을 시작했다. 처음 30만여 명의 군인과 주민들이 출발해 화베이(華北)에 도착했을 때는 그 10분의 1만이 남았을 정도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국민당과의 통일전선이 다시 결성되었다. 이 때 중공군의 공식 명칭이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사람들은 중공군을 팔로군이라고 불렀다.

 

참고: 국민당군과 중국공산당군 

1. 국민당군(국민혁명군)

국민혁명군(国民革命军, 때로는 국부군國府軍으로도 불림)은 1925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했던 중국 국민당의 군사조직으로, 사실상 중화민국의 국민군대였다. 1925년 국민당이 군벌에 대항하여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만든 군사조직으로 출범한 국민혁명군은 신생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 편제를 모방하여 코민테른의 지도로 조직되었다. 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1928년 베이징을 군벌로 부터 탈환하여 북벌이 완성된 이후, 약 10년 간 국민혁명군은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을 토벌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일본 패망 이후 전개된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은 연달아 패배한다. 1947년 중화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국민당 정권이 중화민국으로 정식 변경되자 국민혁명군은 중화민국 국군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1949년에 중화민국 국군은 공산군에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밀려나게 된다.

2. 중국공산당군

중국공산당의 무장조직은 '중국공농홍군(中国工农红军, 약칭:红军)' 이라는 이름으로 1928년 5월에 창립하였다. 약칭 '홍군'으로 불리던 이 조직은 국민당군과 대립하다가 일제의 침략을 받은 이후인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개시와 더불어 편제상 국민당군의 제8로군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자 다시금 국공내전이 발발하였고, 8로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그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국공내전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8월 8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자 중공군은 동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공산당은 화베이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윈난(雲南) 지역에서 미군의 지원 아래 훈련을 받고 있던 국민당군에 비해 동북지역 진출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제적 승인을 받고 있는 것은 국민당 정부였고, 당시 중공군의 병력은 국민당군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때문에 중공군이 국민당군을 이길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스탈린은 8월 20일에 내전을 멈추고 국민당과 다시 통일전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의 협조관계가 대결관계로 변질된 1945년 10월 스탈린은 팔로군 30만의 만주 점령을 지시하였고, 이듬해 1946년 3월 소련군의 만주철수 선언과 함께 팔로군에게 점령지를 넘겨주었다.(1강 내용 참조) 이때부터 만주지역에서 팔로군과 국민당군의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팔로군이 우세했다. 쓰핑(四平)전투에서 팔로군이 국민당군을 격파하고, 그 기세로 창춘(長春)에서도 이겼다. 그러자 장제스 정부는 미군의 지원 하에 육성한 신1군과 신6군을 파견하였고, 미군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이들 군대는 팔로군을 격파해버렸다. 이것이 1946년 5월의 일이다.


▲1928년 중국공산당의 장시소비에트 건설 이후부터 1947년 중국공산군의 대 국민당 반격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개요. 시간의 흐름 순으로 나타난 1에서 8까지의 사건들은 곧 거시적 관점에서의 남북분단사에 다름아니다.


패배한 팔로군 일부는 시베리아 방면과 북한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때부터 북한은 중공의 후방기지가 되어 팔로군은 이곳에서 보급, 재편 및 훈련을 수행했다. 또한 이 때 동만주와 남만주 지역의 팔로군은 그 사이에 국민당군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연락이 곤란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스럽게 북한 경내를 통해 국민당군 점령지역을 우회한 연락 및 왕래가 가능했다. 따라서 북한은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이 되었는데 국민당군은 국경을 넘어 추격할 수가 없었다. 즉 북한은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성소(聖所, sanctuary)였던 것이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북한은 팔로군의 수송통로이자 보급창이었다.


중국대륙이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희생'된 한반도  …
한반도의 분단은 동아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이데올로기 경쟁의 과정이자 결과다


재편된 팔로군이 1947년부터 반격에 나섰는데 국민당군은 이를 당해낼 수 없었다. 팔로군이 북한 지역에서 전투력을 키우는 동안 국민당군의 기강과 군기는 해이해졌고, 정예부대들은 점령군으로 변하여 전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 그리고 공격기지로 제공한 스탈린의 조치로 인해 팔로군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으나 한국분단은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북한이 스탈린과 미국의 승부를 결정하는 과정의 관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귀중한 전략적 요충지를 남한과 통일시킨다면 중공군은 국민당군에게 패할 것이고 그렇다면 중국 전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에게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북한이 팔로군의 후방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는 남과 북이 힘을 합해 통일을 이룬다는 희망은 춘몽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60여 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한국 정세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 내용 정리: 조수룡(경희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 그래픽 : 김세익(대학주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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