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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나는 오늘 그 중 북침설과 함정설이라는 두 가지 주장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먼저 북침설은 6·25전쟁이 이른바 ‘남조선 괴뢰집단’의 북침으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다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하나는 대체로 구소련과 북한의 공식 입장인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들의 도발에 의한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 미국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주장한 ‘rollback regime설’, ‘대한민국 괴뢰설’, ‘맥아더-이승만 음모설’이다. 수정주의자들의 이 주장은 요컨대 대한민국이 공산주의를 석권(rollback), 즉 감아말아서 없애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미국의 괴뢰국가였으며, 6·25전쟁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맥아더(D. MacArthur)와 이승만이 획책해 일으켰다는 것이다.


6·25전쟁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주장, 북침설과 함정설 …
부정확한 문서자료와 정황근거를 바탕으로 한 허구적 주장에 지나지 않아


북침설은 크게 두 개의 문서를 주요 근거로 주장되어왔다. 하나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경무대(당시 이승만 대통령 관저)에서 노획한 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의 서한이며, 다른 하나는 해방 직후 이승만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도쿄에서 ‘이 대령(Colonel Rhee)'이라는 직함으로 워싱턴에 있는 굿펠로우(Goodfellow) 대령에게 보냈다고 하는 전보이다.

전쟁 당시 양측은 점령지역에 남아있던 각종 문서들을 노획했다. 특히 미군은 북한 지역을 점령했을 당시 모든 관공서를 샅샅이 뒤졌다. 미국은 이렇게 노획한 문서를 모두 가져가 현재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보관하고 있다. 얼마나 샅샅이 뒤져갔으면 지금 북한에는 사진도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아 내 책 Communism in Korea에서 사용한 사진이 만경대박물관에 전시되어있을 정도이다.

▲이정식 교수의 저서 . 이 책에서 사용한 일부 사진이 북한 만경대박물관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한국전쟁 당시 남북 상호 간의 문서쟁탈전은 치열하게 벌어졌다.


노획문서보관소는 북한에도 있다. 북한은 서울 점령 후 경무대에서 노획한 문서를 1950년 7월 UN에서 소련대표를 통해 공개했다. 이 때 공개된 문서는 이승만의 자문역으로 활동하던 올리버 교수의 편지였다. 소련은 이 편지를 근거로 남한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사실 증거로서는 빈약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편지의 내용은 올리버가 북침을 원하는 이승만의 심정을 다독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공산당을 몰아내는 데 지금이 적기이므로 미국에 대한 무기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편지에 대해 올리버는 북침을 주장한다면 미국의 지지를 잃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서도 비난받을 것이라고 답장한 것이다. 이 편지를 소련이 UN에서 공개하자 미국 측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문서 자체는 하자가 없는 것이었다.


▲201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앞두고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가 공개한 한국전쟁 기록사진 중 일부. 1) 반파된 수원성의 모습 / 2)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 미군 25사단 23여단 소속 병사들 / 3) 1951년 1월 4일, 1.4후퇴 당시 남하하는 피난민들 / 4) 1951년 1월 5일, 1.4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 / 5) 1950년, 전장을 순시하는 맥아더 사령관. 가운데 인물은 리지웨이 사령관 / 6) 1951년 1월 8일, 파괴된 러시아제 T-34 전차 앞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아낙들


그렇다면 소련과 북한은 왜 북침을 원한 이승만의 서한을 공개하지 않고 그것을 말린 올리버의 서한을 공개했을까? 그것은 북한이 이승만 편지의 원본을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편지는 워싱턴에 있는 올리버에게 발송되어있었다. 전쟁 중 북한이 노획한 이승만의 편지는 먹지로 인쇄된 복사본이었기 때문에 공신력이 없었던 것이다.

북침론의 편에 서 있는 미국 수정주의 학자들의 주장은 ‘대한민국=반공보루설’로 요약된다. 반공보루정권의 사명은 공산세력을 rollback, 즉 몰아내는 것이다. 이 가설은 한반도에서 공산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맥아더와 이승만이 공모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른바 ‘맥아더-이승만 음모설’로 연결된다. 바로 이 음모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된 것이 이승만이 도쿄에서 굿펠로우 대령에게 보냈다고 하는 전보이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이 전보를 근거로 미국무성이 1945년 9월 이승만의 귀국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도쿄에서 그를 만나 음모를 획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전보는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문서이다. 나는 올리버와 이승만 사이에 오고 간 서한을 정리한 경험이 있어 이승만의 문투를 잘 알고 있는데 굿펠로우에게 보낸 서한의 문체는 그것과는 달랐다. 그래서 전보의 원본이 보관되어있다고 하는 후버기념도서관(Hoover Institution Archives)에 문의했더니 그러한 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맥아더-이승만 음모설은 존재하지도 않은 가공의 문서에 기초한 주장이었던 것이다.


전쟁 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치 않은 곳',
대한민국을 반공의 보루로 삼겠다는 착상이 없었던 당시 북침이란 있을 수 없는 개념


수정주의 학자들은 전쟁과정에서 맥아더의 호전성을 근거로 들며 그가 음모에 참가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밀리자 “우리는 한 팔을 묶인 채 싸우고 있다”면서 만주지역에 대한 폭격을 주장한 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가 호전적이라는 것과 그가 rollback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전쟁 전 맥아더는 한반도가 전략적으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D.G. Acheson)은 한반도를 제외하고 오키나와에서 필리핀을 잇는 방위선, 즉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지만, 맥아더는 일찍이 1948년에 그와 똑같은 방위선을 언급하였다. 그런 맥아더가 대한민국을 반공보루로 만들기 위해 이승만을 끌어들여 음모를 꾸몄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추측이다.


▲비밀 해제되어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NARA)가 공개한 한국전쟁 문서 중 하나. 전쟁 15개월 전인 1949년 3월 22일, 미국 국가안보회의(NSC)가 대통령에게 재출한 한국 보고서. 19장 짜리 이 1급 기밀 문서는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1년 전인 1948년 4월에 NSC가 작성했던 한국 보고서를 재평가하면서 한국의 국방, 사회, 정치, 경제상황을 분석한 이 문서는 '빠른 시일 내의 통일 자주국가 수립', '민주 독립국가의 기반 구축을 위한 경제와 교육지원' 등 對한국 정책의 3대 목표를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의 결론부분에는 "1949년 6월 30일까지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대신 1950년 회계연도에 훈련과 무장이 잘된 한국군을 6만 5천 명까지 양성하고, 해안경비대를 4천 명 수준으로 확충하며, 3만 5천 명 규모의 경찰력에 지급할 소형무기와 탄약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북침설은 아니지만 수정주의 학자들의 주장 중 하나인 함정설에 대해 살펴보자. 함정설은 요컨대 미국이 한반도를 방위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임으로써 북한과 소련의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이다. 이것은 가설 자체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무릇 함정이란 어떤 것이건 간에 빠지면 나올 수가 없어야 한다. 미국이 함정을 파서 소련과 북한의 침략을 유도했다면 반격해서 이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리고 미국은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이승만에게 제주도로 피난하라고까지 권고했다. 이렇게 멍청한 함정이 어디 있는가?

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 위와 같은 음모설이나 함정설은 말도 안 되는 얘기처럼 들린다. 구소련 자료들이 공개된 지금 그와 같은 주장이 설 자리를 잃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위 가설들이 한 때 청년세대들의 지지를 받았고 한국 정신사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내가 이 강의에서 이 문제를 다룬 것은 지금 확실하게 반증을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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