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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Carr는 역사를 일컬어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였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기에는 현재가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듯하다. 특히 한국현대사의 경우에는 새로운 자료들이 계속 발굴되면서 연구자들의 시각 수정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소련과 중국 등에서 발굴되는 자료들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많은 학자들은 남한에서 일어난 사건의 원인을 남한 내부에서 찾으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그들은 북한에서 발생한 일련의 일들이 남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특히 중국과 소련 등 강대국 변수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현대사 연구는 간단치 않다. 개항 이래 끊임없이 강대국 정치의 영향을 받아온 한국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주변 강대국인 미국·중국·러시아·일본에서 생산된 자료들을 모두 섭렵해야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그 방대한 자료들을 모두 볼 수 없으니 사건의 일면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국 역사학계는 주제가 너무나 세분화되어서 종합적 시각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한국사를 살피는 작업이라 하더라도 동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을 염두에 둔 거시적 안목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울타리에 갇힌 한국 현대사 연구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 …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거시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어


나는 이번 강의의 부제를 ‘한국현대사의 탐색’이라고 붙였다. ‘탐색(investigation)’이라는 말은 수사관이 범인이나 증거를 조사한다는 뜻도 갖고 있다. 나는 이 ‘탐색’이라는 말이 학문적 연구와 친연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언뜻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단서들을 조각조각 맞춰가며 베일에 싸인 역사의 비밀을 탐색해가는 과정은 범죄 수사과정과 흡사한 점이 많다.

 ▲이정식 교수가 스탈린의 한국정책을 탐구하게 된 계기가 된 세 개의 사건


내가 스탈린의 한국정책을 탐구하게 된 것은 세 개의 사건이 불러일으킨 호기심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1945년 10월 평양주둔 소련군사령관이던 치스차코프가 미군정과 소련군정 사이의 소통을 위해 파견한 연락장교를 별안간 철수시킨 것이다. 그는 상부에서 합의가 있기 전에는 연락장교가 필요하지 않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경제·전기·통화·피난민·전염병 등 미소 군정 간에 협의가 필요한 문제는 산적해있었다.

두 번째 사건은 같은 해 10월 15일 치스차코프가 수돗물 정화에 필요한 염소(Chlorine)를 주겠다고 연락해왔다가 그것을 인수하러 간 미군장교들을 보름 만에 빈손으로 돌려보낸 일이다. 당시 한반도에서 염소는 흥남에 위치한 화학공장에서만 생산이 가능했다.

세 번째 사건은 38선을 넘어야만 갈 수 있었던 미군 관할 지역인 황해도 옹진 지역에 대한 미군의 통행에 제한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옹진반도는 황해도에서 남쪽으로 돌출된 지역으로, 38선의 통행이 제한되면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다. 소련 측이 갑자기 이 지역으로의 통행을 제한함에 따라 미국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 나는 이 시기 무언가 중요한 상황변화가 작용하여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런던 외무장관회의를 기점으로 급격히 바뀐 스탈린의 정책노선…
한반도 분단을 전후로 한 당대 세계정국에서 가장 주요한 인물, 스탈린


그러던 중 나는 1995년 베를린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했다가 깜짝 놀랄만한 발표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첸지안(陳兼, Chen Jian) 교수의 발표였는데 내용인즉 스탈린이 1945년 10월에 대중국정책을 180도 전환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8월 20일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과의 내전을 마무리하고 연합정부를 수립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10월 8일에는 입장을 바꾸어 30만 대군을 만주로 보내 투쟁을 계속하라고 했다. 두 달 사이에 무언가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는 나의 심증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이 때 왜 스탈린이 정책을 180도 바꾸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소련은 미국과 전면 대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소련의 산업기반은 심각하게 파괴되어 전후복구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은 수풍댐의 발전기와 같은 각종 산업설비들을 반출해가기도 하였던 것이다. 미국 또한 2차 세계대전을 치렀지만 본토가 독일과의 격전지가 된 소련과는 달리 모두 해외에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산업이 고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스탈린은 미국과 대립하려고 했을까? 나는 그 해답을 1945년 9월 초부터 10월까지 런던에서 열린 외무장관회의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인 이 회의에서는 Korea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래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한반도의 장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미소간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런던 외무장관회의에서 소련의 요구사항(보라색)은 미국과 영국에 의해 모두 묵살됐다. 이에 소련은 회의를 결렬시키는 한편, 중국 국공내전의 확전을 지시하고 북한을 중국 공산화의 후방기지로 활용하게 된다(붉은색).


이 회의에서 소련은 두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하나는 전후 일본통치에 참가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리비아의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 지역을 할양받는 것이었다. 두 요구는 모두 소련 해군의 항로 확보와 관련된 것이었다. 소련이 일본통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블라디보스톡에 위치한 소련 극동함대는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을 확보한다면 흑해함대가 지중해로까지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는 셈이었다. 특히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의 할양을 위해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는 이틀 동안이나 미국을 졸랐(hammered on)지만 미국과 영국은 두 요구를 모두 묵살해버렸다. 여기서 감정이 상한 스탈린은 회의를 결렬시켜버리고 10월 8일 중국공산당에 확전을 지시한 것이다.

런던회의가 스탈린의 대외정책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확실했지만 이것을 한반도정책의 변화를 야기한 직접적인 증거로 간주하기는 불충분했다. 나는 보다 더 직접적인 증거를 찾고 싶었다. 추적을 계속하던 중 결국 나는 결정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북한에 광범한 반일민주주의 정당의 연합을 통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하라”는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찾아낸 것이다. 여기에 미국과 상의해서 하라는 말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즉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분단 고정화의 이유를 1946년 봄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승만·맥아더·하지의 ‘음모’ 등에서 찾아왔다. 하지만 스탈린의 지령은 1945년 9월, 즉 이승만이 귀국하기도 전에 내려진 것이다. 소련은 이미 이 때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도는 실제 단독정부 수립 작업으로 연결되어 1946년 2월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이것이 1947년에는 인민위원회로 전환된 데 이어 1948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처럼 한반도의 분단에는 한반도 내부의 역학관계 뿐만 아니라 미소간의 관계변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한국현대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주변국가들 및 강대국 간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두고 세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 내용 정리: 조수룡(경희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 그래픽 : 김세익(대학주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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