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마니타스칼리지 - 대학주보 공동기획, 고전의 사계 ⑦
인간들이 자유를 누리면서 어떻게 더불어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성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지혜의 보고다. 《성서》의 지혜는 신앙 유무와 상관없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인류 문명의 자산이다.
《성서》를 그냥 읽는다고 지혜가 저절로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성서》의 핵심 메시지, 즉 ‘바이블 코드’를 알아야 한다. ‘고르지 못한 인간 세상을 고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이블 코드’이다. 이사야 40장 3-4절은 《성서》의 핵심 메시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외친다. “광야에서 여호와(신)의 길을 준비하여라… 모든 골짜기가 높아지고, 모든 산이 낮아진다. 거친 땅이 평탄하게 되고, 험한 땅이 평야가 된다.”
세상은 고르지 못하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권력, 부, 명예, 혈통, 지식, 도덕성 등은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하는 자원들이다. 이 자원들을 소유하는 정도에 따라 높낮이가 결정된다. 성서는 이러한 자원들을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큰 자’라고 부르고, 적게 가지거나 아예 가지지 못해 밑바닥에 위치한 사람들을 ‘작은 자’라고 부른다. 《성서》는 고르지 못한 인간 세상을 방치해 더욱 고르지 못하게 하는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를 ‘세상나라’로, 고르지 못한 인간 세상을 고르게 하는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를 ‘하늘나라’으로 표현한다. 하늘나라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건강한 사회’이고, 세상나라는 이로부터 이탈한 ‘병든 사회’이다.
세상나라는 큰 자가 되어 대접을 받으면서 작은 자를 업신여기고 군림하는 것을 삶의 가치로 삼는다. 여기서는 서로 큰 자가 되어 힘을 과시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이에 반해 하늘나라는 스스로를 낮추어 작은 자의 친구가 되고 그를 섬기는 것을 삶의 가치로 삼는다. 여기서는 자신을 큰 자로 여기며 과시하는 것을 치명적인 교만으로 간주한다. 《성서》는 일관되게 신(God)이 작은 자의 친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서》가 강조하는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내세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변혁의 책이다. 《성서》를 제대로 읽으면 누구나 변혁가가 된다.
《성서》의 시작인 ‘창조선언’은 고르지 못한 인간 사회를 고르게 만들기 위한 ‘대전제’이다. 창조선언에 대해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의 논쟁에 빠지면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진짜 지혜’를 놓치고 만다. 이 선언에 의하면, 인간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유한한 피조물이다. 어떤 인간도 감히 신의 지위까지 높아지고 커지려는 야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창조선언은 고개를 쳐들고 신처럼 되려는 인간의 ‘자기영광 높이기(self-glorification)’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장치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정치권력, 부, 명예, 혈통, 지식, 도덕성 등 어떠한 것을 가지고도 동료 인간 위에 서서 숭배 받으려는 자기영광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만은 인간 사회의 조화를 파괴하여 파국으로 몰고 간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유한자이며, 그 차이는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의 차이에 불과하다.
창조선언 이후 이어지는 《성서》 이야기는 고르지 못한 인간 세상을 더욱 고르지 않는 쪽으로 몰고 가려는 인간의 야망과 이 야망을 중단시켜 고르지 못한 세상을 고르게 만들려는 신의 의지 사이의 충돌의 대서사이다. 《성서》가 괜히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필요한 지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성서》를 꼭 읽기 바란다. 그리고 손에 넣기 바란다. 인간과 신의 충돌 이야기 속에 나타난 그 엄청난 지혜는 신자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2013.05.06 | 윤원근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