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마니타스칼리지 - 대학주보 공동기획, 고전의 사계 ②
공자는 《논어》를 읽어본 적이 없다. 뚱딴지같은 이야기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공자는 그저 말을 했을 뿐이고 한번 내뱉은 그 말은 여느 말처럼 공중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공자는 자신의 말이 후세에 전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말을 기록한 《논어》는 당대에 엮인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두 세대 동안을 견디다가 제자의 제자 대에 이르러 비로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록된 내용을 읽어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난생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칠 만큼 재미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슴 불타는 정의감을 불러일으키는 말도 없기 때문이다.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를 테면 이런 내용이다.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퇴근하여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다쳤느냐?” 그리곤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게 끝이다. 도대체 제자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말(馬)과 사람이 어떤 값으로 거래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값보다 말 값이 더 비쌌다는 이야기다. 사람보다 말의 값어치에 더 관심을 두었던 세상에서, 그 반대로 행동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의미는 자못 크리라. 제나라의 재상 안영이 현인 월석보를 말 한 필과 바꿔 온 이야기라든가, 진나라 목공이 양을 대가로 주고 노예로 끌려가던 백리해를 데리고 온 일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까닭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값어치가 있다고 여긴 것보다 사람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은 평범하지만 사실 세상의 가치 서열을 송두리째 뒤엎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값어치가 있다고 여긴 것보다 사람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은 평범하지만 사실 세상의 가치 서열을 송두리째 뒤엎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이다.
《논어》는 새 책이 아니다. 2,5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견뎌 온 헌책 중의 헌책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지속되는 것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책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어떤 책의 존속여부를 가늠하는 데 시간의 흐름보다 더 공정한 심판관이 있을까. 《논어》는 그 긴 세월 동안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읽혀왔다. 순자는 《논어》의 편제를 따라 자신의 저술을 남겼고 사마천은 《논어》의 구절로 열전을 시작하고 마무리했으며, 책 살 돈이 없어 서점에서 책을 통째로 외웠다는 한나라의 왕충은 《논어》를 읽은 뒤 공자에게 따져 묻는 <문공편>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송나라의 재상 조보는 반부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렸다는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라는 말을 남겼다. 전통 시기 《논어》는 고전이 아닌 ‘경(經)’으로 절대시됐다. 그러나 근대의 길목에서 《논어》는 봉건윤리의 대명사로 지목되더니, 급기야 지주계급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비판받았다. 또 문화혁명 때는 공자를 반혁명분자라 비난하는가 하면 오곡을 분간치 못하고 사지를 놀리지 않는 기생충이라 했다. 다 맞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성현의 말씀을 팔면서 손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남의 땀으로 빚은 음식에 빌붙는 자가 많으니 말이다. 얼마 전 이 나라에 왔다 간 인기 지식인 슬라보예 지젝은 《논어》를 읽고 공자를 멍청이의 원조라 했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어떤 책도 멍청하게 읽으면 멍청한 책이 되기 마련이니. 《논어》를 읽고 나서 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는 다 일리가 있는 말이며 심지어 그 반대로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다만 읽지 않고서는 이들 커뮤니티에 낄 수가 없다. 이 시대에《논어》가 멍청이의 헛소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삶의 양식이 될 것이냐는 모름지기 당신이 《논어》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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