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마니타스칼리지 - 대학주보 공동기획, 고전의 사계 ③
플라톤은 기원전 4세기경의 고대 헬라스(그리스) 철학자로 그의 철학이 서양철학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유럽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주석들로 이루어졌다”는 화이트헤드의 언급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플라톤 철학은 서양철학의 근원이며, 서양철학의 모든 문제의식을 망라하고 있다는 증언이다. 특히 그의 ‘이데아 이론’과 ‘삶에 대한 견해’는 아직도 종결된 철학사적 문제가 아니다.
그의 철학은 단순히 위대한 천재 철학자의 사유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조국 아테네의 현실과 앞선 철학자들의 사상을 근거로 치열한 사유과정을 통해 잉태되고 출산된 것이다. 당시의 아테네 현실은 중우정치로 전락한 민주정치에 의해 그릇된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결과 아테네는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의 심각한 질환상태에 처했다. 플라톤은 그런 질환의 원인을 진단해서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고 이를 통해 훌륭한 현실을 실현코자 했다. 그의 철학은 그런 척박한 토양에서 성장해서 결실을 맺은, 현실과 사유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소산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현실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 저술이 그의 중기 대작인 《국가》이다. 거기서 그는 질환상태에 처한 당시의 현실을 ‘지성부재’의 상태로 진단한다. 나라 안에서도 개인에게서도 ‘지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지성회복’을 그 질환을 없앨 처방으로 제시한다. ‘지성회복’이야말로 훌륭한 나라의 성립과 훌륭한 시민의 형성을 위한 길이다.
그는 이를 제시하는 가운데 ‘올바름’(정의)을 위시한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최선자정치, 이데아이론, 변증술, 좋음의 이데아, 모방이론 등을 논의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다양한 논의를 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훌륭하게 사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천착한다.
아닌 게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한테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어느 때든 인간은 살되 ‘훌륭하게 사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훌륭하게 사는 것’을 가리키는 헬라스어는 ‘eu prattein’이다. 이 말은 ‘잘 지냄’ 또는 ‘안녕’의 뜻을 지닌 일상어이다. 이런 일상적 뜻을 지닌 이 말은 ‘행복’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eu prattein’은 원어 그대로는 ‘잘 사는 것’을 뜻하며, 이 뜻은 일상적인 ‘부유함’과 연관된다. 우리말에서도 ‘잘 사는 것’은 일상적인 ‘부유함’을 가리킨다. 그런데 플라톤은 ‘eu prattein’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캐묻는다. 그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훌륭하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플라톤은 ‘잘(eu) 사는 것’을 ‘사람으로서 훌륭하게(eu) 사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훌륭하게 사는 것’은 사람 특유의 ‘구실’, 즉 ‘지성’과 ‘탁월성’(arete)에 근거해서 이해된다. 인간의 ‘탁월성’은 사람 특유의 ‘구실’을 잘 하는 데에서 실현되며, 사람의 구실을 잘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으로서 훌륭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훌륭하게 사는 것’에 대한 플라톤의 이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음미해 볼만한 것이다. 여기에 《국가》를 읽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국가》를 읽으며 우리는 때로 당혹스러워 한다. 산문이 아닌 대화 형식의 글인 탓도 있고, 그 내용 파악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이런 어려움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우리말 번역이 있다. 박종현 교수가 옮긴 《국가·政體》(서광사, 1997)가 그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2013.03.18 | 김태경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