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99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주보 공동기획, 고전의 사계

1559년 어느 봄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청량산에 은거하고 있던 퇴계 이황은 멀리 광주에서 보내 온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 전 해 그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잠시 성균관 대사성을 맡았는데 그 때 기대승이라는 젊은 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기대승은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막 올라온 참이었지만, 이미 나라 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그가 급제해 조정에 나아가자 온 나라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이황은 그를 만나 잠시 태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짧은 만남이었지만 기대승의 도저한 학문의 깊이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는 바로 그 기대승이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는 근황을 묻는 인사말과 함께 사단과 칠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었다.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이()와 기()로 나누어 대거 호언한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퇴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칠정은 욕망이다. 그리고 사단은 욕망 중에서 선한 것이다. 그렇다면 칠정도 사단도 다 같이 욕망인데 퇴계 자신은 일찍이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범주 오류의 혐의가 없을 수 없다. 기대승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명쾌하고 당당한 지적이 아닌가. 퇴계는 생각을 이어 갔다. 기대승의 지적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도덕과 욕망의 근원이 같다는 주장만은 납득할 수 없었다. 퇴계의 생각이 무르익는 사이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황금빛 가을이 지나갔다.

서설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 퇴계는 붓을 들고 써내려갔다.

지난번 만나고 싶은 소망은 이루었지만 꿈속에서 잠깐 만난 것처럼 서로 깊이 알 겨를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뜻이 흔연히 부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대가 사단칠정을 논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내 생각이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던 차에 보내주신 편지를 읽고 보니 더욱 엉성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처음 만난 날부터 고루한 소견이 박학한 공에게 도움을 얻은 바가 많았는데, 하물며 오래 사귀게 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편지는 서울에 있는 제자 정자중에게 보내졌고 다시 기대승이 머물고 있던 전라도 광주로 전해졌다. 그 사이 편지는 전국을 돌면서 선비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켜 천하에 공맹과 주자의 학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렸다. 이후 퇴계와 고봉은 장장 8년간 도덕과 욕망의 관계를 논하는 편지를 주고받는다.

위의 이야기는 퇴계집에 실린 편지 한 통이 쓰여지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이 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퇴계집은 분명 이황의 글을 엮은 개인의 문집이지만 단순히 한 사람 개인의 저술로만 볼 수 없을 정도로 지성사적 의미가 크다. 이 책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교유한 당대의 올곧은 선비들은 물론이고 옛사람들의 정신세계까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몇 달 동안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주자의 글을 한 번씩 보았는데 마치 바늘이 내 몸을 찌르는 것 같았고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 글의 한 구절인데, 그가 선현의 글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가 활동했던 때는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화와 당쟁이 격화되어 탁류가 도도히 흐르는 암흑의 시대였다. 하지만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그는 그토록 어두운 시대에 자신을 수양함으로써 오히려 세상에 드러났다.

책을 읽다가 바늘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적이 없다면 아직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퇴계退溪이황李滉,『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중「회암서절요서晦庵書節要序1」

2013.05.13 전호근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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