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0

 

안녕하세요, 識者無識(식자무식)입니다.
우리는 대학에서 교과과정으로 제공되는 지식들을 4년정도 배우고 공부하지요. 그런데 대학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해서 어떤 장소인지 크게 생각해보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여태까지 대학을 다녔지만 별다른 생각을 해보진 않았는데요. 어쩌면 대학이란 장소는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동시에 가장 낯설을 수도 있는 곳이 아닐까합니다.

경희대에서는 그동안 후마니타스칼리지 등의 상당히 의미심장한 시도를 준비해왔는데요. 내년부터 실제로 실시될 예정으로 대학주보와 TV뉴스, 그리고 신문매체 등을 통해서 학우여러분도 관련 정보를 접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학문화 칼럼에 연재할 내용도 이러한 경희의 도약을 위한 준비과정에의 개입으로서 함께 대학이라는 공간과 교과과정 등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함입니다. 

아마도 내년에 개편될 교양 교과과정과 전개될 대학문화의 변화는 입학 후부터 졸업 때까지 우리학우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대학적인 특이성의 형식을 갖추고 그 내용을 견실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면, 앞으로 우리대학을 졸업할 재학생들과 입학할 신입생들에게 경희대학만의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일 수 있는 특이성을 갖춘 인재로서 자부심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천편일률적인 기능전문직이 아닌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경희대학인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창의적이라는 말은 이제 너무나 많이 쓰여서 지겨울 정도이지만, 그러한 창의성은 지금과 다른 커다란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촌철살인이라는 말처럼 아주 작은 차이가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지요.
대학문화 칼럼을 함께 읽어가시면서 그러한 중핵을 꿰뚫을 수 있는 극소차이, 다시말해서  학부여러분들에게 잠재해 있는 미세하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변혁을 추동하는 통찰력에 대한 욕구를 가지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글은 대학문화 칼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글입니다. 
저번 식자무식 칼럼에는 대학문화 칼럼의 목차를 간단하게 올렸었는데요. 연재할 때마다 그날 연재되는 글의 구체적 목차를 추가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3. 대학사회의 현재와 오래된 미래의 도입부까지 연재됩니다. 목차는 바로 아래에 있구요. 글에 대한 전달이 쉽도록 중요단어는 짙은 글씨로 표시하였습니다.(스크립트 과잉문제로 최소한으로만 표시할 수밖에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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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 상자 그림)

 

위와같은 그림이 그려진 글상자에는 독자분께서 읽기 쉽도록 그 위에 제시된 문장에 있는 단어들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을 적어놓았습니다. 문장의 구성이 우리가 생활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들어가있어, 어렵게 보이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어를 보시면 떠오르는 의미와 다르게 쓰지 않으려 하였기에,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떠올리시면 글을 읽으실 때 어려운 단어는 그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주일 중 한번쯤은 조금은 까다로운 것 같이 보이는 이런 글을 저와 함께 천천히 읽어가보면 어떨까요. 조금은 까다롭게 보이는 글들을 읽어나가다보면 다른 글들을 읽으실 때는 왠지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읽으시다가 의문점이나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시면 댓글로 적어주세요.

또한 글씨크기나 바꾸었으면 하는 사항이 있으면 댓글로 적어주세요.
10월 첫째 주 대학문화 칼럼을 시작합니다. (^o^)

 






식자무식 大學文化(대학문화) 칼럼 

 

 


10월 2일    

 

질문이라는 장소 -대학적인 질문을 위하여-

 

0. 숫자0의 위상에 대하여
1. 질문이라는 ()가능성

2. 질문의 장소는 어디인가? 
    2.1. 내재적 간극과 극소차이, 그리고 변혁의 가능성
3. 대학사회의 현재와 오래된 미래

 

 

 



 

 

 

질문이라는 장소 -대학적인 질문을 위하여-




0. 숫자0의 위상에 대하여



통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은 3대 혁명적 이론이라고 불리 운다. 과학자들은 프로이트 이후 제4의 혁명으로서, Matrix처럼 유기체적인 기계로 프로그램화된 마지막 기획을 뇌과학과 같은 생물학에서 찾고 있지만, 오히려 제0의 혁명을 고려해보는 것이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0의 혁명은 그 자신과 혁명적 이론의 위상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필연적 우연이라는 혁명의 구조를 이야기해준다. 그렇다면 제0의 혁명은 무엇인가? 단지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시간성의 사유에 얽매이지 말고, 그 가능조건을 모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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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의 혁명

1(지동설) ~ 2(진화론) ~ 3(무의식) ~ 4(숫자'0')
0(숫자'0') ~ 1(지동설) ~ 2(진화론) ~ 3(무의식)


 제1혁명에서 제3혁명 그리고 숫자‘0’의 혁명까지 4개의 혁명이 있다고 한다면 숫자‘0’의 혁명은 제3혁명이라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 다음의 것으로 제4의 혁명으로서 제시될 수 있습니다. 또한 1, 2, 3, 4 …이라는 숫자상의 배열에서도 제0의 혁명은 네번째 기획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렇듯 숫자'0'의 혁명은 시간상 제4의 혁명으로서 가장 나중의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처음의 기획으로 불릴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1, 2, 3, 4이라는 숫자상의 배열에서 0의 혁명은 제4의 혁명이지만 동시에 (숫자‘0’이 가진 위치에 따라서 혹은 우리가 0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발음상의 측면에서) 배열 상 가장 처음으로 제시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역사적으로도 0이 가진 의의가 나중에 구성되었지만, 실제로는 가장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숫자'0'에 대한 제4의 혁명이 가진 위상은 가장 나중이지만 동시에 가장 처음으로서, 시간상의 순차적 배열을 흩트러뜨리는 상당히 역설적인 장소에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열을 흩트러뜨리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두 가지 유머를 한번 들여다봅시다. 서구에는 경찰들을 놀리는 방법이라는 유머가 있다고 하는데요. 돼지 3마리에 미끄럽게 기름을 듬뿍 칠하고, 숫자 1, 2, 4를 각각의 돼지에게 표시합니다. 그리고 나서 공공장소에 돼지들을 풀어놓으면 경찰들은 3마리의 돼지를 찾은 후, 나머지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진땀을 뺄 것이라는 내용이지요. 같은 버전으로 학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유머도 있습니다. 고도로 학문적인 9부의 책을 준비한 후 1권부터 10권까지 번호를 붙이는 것입니다. 물론 9부의 책밖에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 7권이라고 적힌 책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지요- 중간에 책의 배열번호는 누락되게 됩니다. 그런 다음 학자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에 가져다 놓으면 학자들은 실제로는 부재하지만 존재하는 1부의 책을 찾으려 한다는 유머이지요. 이렇듯 배열이 단순히 흩트러 진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배열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했었다는 점은 타자를 ‘매우’ 당혹스럽고 수고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겠지요.

 


▨ 필연적 우연과 시간성의 사유
 혁명적 이론구조란 기존의 배열 자체에 중지를 기입하는 체계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force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기존의 구조structure적 배열의 원리가 그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전개된다면 혁명이나 중지와 같은 우연적인 사건은 아마도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구조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원리는 필연성을 통해 스스로를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게 하려하겠지요. 이처럼 필연의 논리로 이루어진 체계 내적구조에서는 그러한 배열에 틈을 내는 우연적 사건이 허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필연적 논리가 작동하는 체계에서 그러한 구조 자체를 중지시킬 수 있는 우연적 사건이란 가능한 것일까요? 만약에, 우연적인 사건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것은 체계가 가지고 있는 필연의 논리일까요? 우연의 논리일까요? 둘다 아닐 수도 있고, 둘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필연의 논리는 내부에 가능성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우연적 사건을 외부의 대립항으로 투사함으로서 자기자신의 구조에 필연적인 안정성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필연 對 우연이라는 대립구조를 통해서 우연한 사건이 필연의 구조 속에 마치 침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요. 그러나 필연적 우연이라는 특이한 사건은 이러한 이항적 대립구조를 그 전제에서부터 흔들어 놓습니다. 다시 말해서 필연인지 우연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중성은 대립구도로는 설명될 수 없는 대립구도의 내적 불가능성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필연적 우연이라는 사건은 필연과 우연의 대립구조와는 다른 논리를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립구도와 투사를 통해 내적 배열의 안정성을 이루려는 체계를 그 안에서부터 파열시키는 내파적 효과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서 구조의 필연성은 그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필연적 우연은 필연의 내적 동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대립구조를 중지시키는 혁명적 위상구조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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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을 외부로 투사 → 필연성의 자기동일화                         필연과 우연의 대립구조 

                                                                                                 대립구조는 자기동일성을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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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연과 우연의 대립구조 자체의 중지                               구조 자체의 내재적 파열

                       대립구조는 제3의 영역이 드러나지 않게 한다



그렇다면 우연한 필연성이라는 말도 가능한 것일까요? 우연성의 논리에 있어서 필연성의 출현은 우연성 자신을 놀라게 하는 우연적인 너무나 우연적인 사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우연성을 완성하게 만드는 마지막 우연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한편으로 필연성은 관계에 있어서 확고한 근거를 바탕으로 가능한 것인데, 앞서 언급된 마지막 우연성처럼 그러한 필연성이 우연하게 시작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럴 때 우연성은 필연성을 망가뜨리는 부정적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필연성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인 조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필연성의 논리에 있어서 우연성의 출연은 필연성 자신이 무너지는 마지막 필연성으로서 필연적인 너무나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연에의 우연으로서의 필연성과 필연에의 필연으로서의 우연성. 만약 자신의 등 혹은 뒤통수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있다면 이러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시간성의 사유는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고 시작과 중간과 끝을 구분하는 방법을 통해서 필연의 인과론적 구조를 강화시킵니다. A가 원인이기에 결과는 B이다. 시작(a)에서 중간(b)으로, 그리고 끝(c)으로 이어지는 구분은 예측불가능한 우연적 사건을 배제하는 것을 통해 배열의 안정성을 지지해주지요. 시간성의 사유에 따르면 숫자0에 대한 제0의 혁명은 단순히 네 번째로 제시되는 혁명이지만, 필연적 우연이라는 혁명적 이론의 동시적 시간성에서 제0의 혁명은 가장 나중이지만 동시에 가장 처음인 제4혁명이자 제0혁명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됩니다. 만약 원인과 결과, 시작-중간-끝이라는 필연성의 논리가 온전히 작동한다면, 우리에게 있어 자유라는 예측불가능성은 제거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필연이자 우연이라는 시차적 위상을 과연 온전히 제거할 수 있을까요.

 

 

 


자‘0’의 발견은 수학에 있어서 혁명적인 발견이라고 불린다. 무한대의 사유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 대수학에 있어서의 그 실용적인 측면 등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혁명적인 이론의 구조적 조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의 ‘0’ 그 자체의 위상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0’의 위상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하다. ‘인식론적 불가능성이 존재론적 조건이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0’은 어떤 숫자에나 이미 항상 있지만 그 자체로는 인식될 수 없는 숫자이며, 실제로 존재했어야 했다고 가정되어야 했던 선-수학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만약 ‘0’이 없다면 수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실제로 존재했었어야만 하는 것으로 가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숫자'0'은 규칙에서 벗어나 있지만, 수의 배열에 포함되어 있어야지 모든 숫자가 가능하게되는 장소에 있다.(아마도 ‘0’으로부터 수의 연쇄가 없었다면 ‘0’의 존재도 드러나지 않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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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론적 불가능성이 존재론적 조건이다.
☞ 시각중심주의적인 서양에서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보여지지 않는 것이란 부재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까지도 하지요. 그런데 인식할 수 없거나, 보여지지 않는 것은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인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인식이란 거리를 전제하면서 작동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거리가 있을 때 인식하기가 더욱 쉬워지고 거리가 거의 없을 때는 인식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지요.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에는 발바닥에서 늘어진 그림자까지 어느 정도 거리를 가지지만, 정오에 그림자를 찾기 어렵듯이 거리=0일 때는 어디에 있는지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보통 우리는 거리가 멀은 곳에 인식대상이 있다고 하면, 조금 더 다가갈수록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모든 곳을 볼 수 있는 인식범위 혹은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인식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리가 0인 상태의 인식대상은 자기 안(거리=0)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스스로의 장소(내부)를 돌아보지 않는 이상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되지요. 너무나 멀리 있기에 인식할 수 없거나 인식되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인식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에서 관찰이란 보는 자와 보이는 자(재현되는 대상)의 구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현체계에서는 보여지는 대상을 시각을 통해 관찰함으로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그를 통해서 대상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되지요. 때문에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지식이 쌓여갈 수록 대상에 대한 지배력이 강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A를 제시하면 합리적 선택에 따라 B를 선택하거나 C를 제시하면 D를 선택할 것이라는 지식이 있다면,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에 있어서 용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보여지고 있는 대상이 예측 불가능한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보는 주체가 온전하게 인식하여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식론적 불가능성이란 예측 불가능한 자유로운 행위의 가능성을 지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인식론적 불가능성이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은 자유의 가능성이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식론적 불가능성이 제거된다면 체계 그 자신도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자유를 자의식이라고 생각하시면, 인식론적 불가능성인 자유가 제거되어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통제되는 상태라고도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있다면, 우리의 느낌과 사유와 행동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기를 원하거나 그렇다는 것을 입증하려한다면 아니 우리가 자유와 마주하고자 한다면 인식론적 불가능성이 존재하며, 그것은 제거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조건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요.)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그러한 제거될 수 없는 존재론적 조건의 사례를 생각해봅시다. (앞서 필연과 우연이라는 관계도 자기 스스로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을 가능조건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볼 수 있는 이유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시각은 자신은 볼 수가 없는, 즉 인식(≑시각)이 불가능해지는 맹점을 눈동자 속에 포함하고 있기에 가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 대한 시각 혹은 통찰이란 자기자신이 불가능해지는 맹목의 지점(맹점)을 포함하여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맹목(blind-ness)의 지점은 보이지 않는 지점이기에 통찰(insight 시각)을 불가능하게 하는 부정적 장애물인 동시에 통찰(시각 혹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통찰의 (불)가능조건으로서의 맹점- 다시말해서 맹점(인식불가능성, 자신의 결핍)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시각은 불가능하기에, 껴안고 갈 수밖에 없는 존재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장소를 볼 수 있는 눈all seeing eye은 자신의 시야에 자신도 모르게 노출(맹점)being seen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노출된다는 것은 우리가 먼저 시야에 담을 수 없는 대상이 우리가 인식하기 전에 우리들을 먼저 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먼저 시야에 담을 수 없는, 볼 수 없는 맹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시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통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은 신의 시선이라고도 말해지는데, 앞의 문장을 신의 시선과 연관시켜서 바꾸어보면 신(의 시선)은 신 자신의 결핍(blind spot)을 품고 있어야 스스로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한계를 신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시선의 장소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이러한 논의는 인식의 조건을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예를 들어서 생각해볼까요? 유대교의 비밀 가르침인 카발라사상에는 ‘신의 수축’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능한 유일신을 이야기하는 유대교의 경전 카발라에서 신의 분열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신의 수축을 묘사한 다음의 구절을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무한자의 빛만이 가득했고 어떤 공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계를 창조하기위해 무한자는 스스로를

수축하여 자신의 한가운데에 빈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 구절은 신학적인 맥락에서 세계의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되는 부분입니다. 전능한 자는 자신의 몸을 구부려 자기 자신이 보여지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지점에서 스스로의 시선에 노출시킴으로서, 신은 스스로에게 결핍(빈 공간)을 선사하는 자기-수축적인 움직임(세계의 창조)을 통해 모든 곳을 볼 수 있는 자All see(n)ing eye로서의 신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다시말해서 보여짐으로서(맹점의 존재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며 절대적인 신은 자기 자신에게도 절대적이기에 질대적인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만약 신이 결핍이 없는 온전한 자라면 악의 손이 닿는 세계를 창조할 이유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의 결핍을 증언하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신은 온전한데, 이 세계가 잘못된 것이다(사회는 온전한데 개인이 잘못된 것이라거나, 청년실업이 문제인 것은 정부의 무능이 아니라 직장에 대한 젊은이들의 눈높이가 높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거나, 신은 신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의 결핍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전체All란 비-전체Not-All의 형태, 그 자신의 결핍(blind spot)을 껴안을 때에만 전체로서 가능하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신은 보편자이지만 분열된 보편자로서만 신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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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보편성으로서의 신 (세계라는 결핍을 자신의 존재조건으로 포함하고 있는 신)

           신과 신 자체라는 최소차이(분열, 틈새)가 신을 가능하게 한다. 

신은 모든 곳에 있기에 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세계 또한 신 자신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세계라는 부분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을 신이게 하는 구성적인 특이성으로서 가장 신에게 내밀한 중핵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서 세계라는 신의 결핍은 신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존재조건(심장으로서의 신 자체)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버리거나 제거해버릴 수 있는 소유대상이 아닌, 존재조건으로서의 자기-결핍을 지시합니다. 이 논의는 결과적으로 신의 전능과 자유의지(신의 결핍)라는 고전적 화두로 이어지는데, 앞서 논의에서처럼 분열된 보편성으로서만 신이 존재가능하기 때문에 자유의지라는 신의 결핍(심장으로서의 신 자체)은 제거불가능한 (불)가능조건이라는 위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발라의 구절에 따르면 세계를 창조하기위해 무한자는 스스로를 수축하여 자신의 한가운데에 빈 공간을 선사하지요. 자기 자신의 결핍을 껴안는 행위, 이것을 기독교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요.


“신의 결핍=신의 분열=심장으로서의 신 자체=자유의지=인간=세계의 창조=사랑=최소차이 그리고 질문”


여기서는 그러한 사례를 숫자'0'에서 찾고 있습니다. 숫자'0'은 인식불가능하다는 면에서 자유와 같은 위상에 있습니다. 한편 모든 숫자는 0에서부터 시작되기에, 0이라는 인식불가능성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숫자'0'을 배제해버리거나 제거해버린다면, 숫자의 배열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0이라는 재현불가능성은 제거될 수 없는 존재조건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가정되어야만 할까요? 

 

 


러나 왜 가정되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사과가 0개가 있다고 표현하지만, 사과 0개를 묘사하거나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0’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그것인 ‘0’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시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0’이란 인식이 불가능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시하며, 동시에 그것은 인식체계에 있어서 제거할 수 없는 얼룩과 같은 존재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이렇듯 인식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체계 혹은 구조의 인과론적 규범에 있어서 인식 혹은 지배할 수 없는 한계로서 인과론을 꿰뚫는 우연적 행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0'의 위상을 지닌 인식불가능성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바로 그 체계와 구조의 내재적 간극 또는 한계가 터져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구조와 체계에 있어서 '0'이란 공가능성, 또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이미 항상 존재하지만 배제되거나 억압 혹은 은폐되었어야만 하는, 혹은 그렇게 가정되어야만 하는 외상적인 중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외상적인 중핵과의 마주침이 이론의 내부적 파열을 추동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내파는 혁명적 이론이 가진 구조적인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체계 혹은 구조 속에서의 ‘0’의 위상은 마치 심장과 연결되어있어 제거하거 되면 자기 자신이 죽어버리기에, 껴안고 갈 수 밖에 없는 상처와 같은 제거될 수 없는 가능조건이자 불가능조건인 존재조건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렇듯 혁명적인 이론에 있어 구조적 위상으로서 ‘0'이라는 공가능성은 질문이라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에서도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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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룩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인식가능하도록 재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모든 것이 거울을 통해 보여질 수 있지요.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거울은 일종의 세계가 우리를 보는 눈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거울이란 재현체계를 형상화한 것이지요.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울이 있다면, 재현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인식론적 지식을 획득하여 대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울의 한가운데에 시커먼 얼룩이 기입되어 있어서,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인식될 수 없는 부분, 재현될 수 없는 부분(자유라는 맹점)이 거울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부분을 떼어버리려고 하면 거울 자체가 금이 가서 깨져버리게 때문에 얼룩을 그대로 두거나 수건과 같은 것으로 마치 얼룩이 없는 것처럼 가려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숫자'0'이란 얼룩의 위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거해버리면 전체가 망가지고, 그것이 숫자배열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숫자자체가 불가능해지지요.(숫자자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숫자배열 안에 존재해야하지요) 그러나 동시에 재현될 수 없는, 규칙에서 벗어난 숫자'0'이 존재하면 숫자의 배열과 규칙 자체의 안정성이 무너져버립니다.

  


▨ 인과론을 꿰뚫는 우연적 행위, 현실화
 지배할 수 없는 한계로서 인과론을 꿰뚫는 우연적 행위는 앞서 언급된 인과론적 논리로는 통제될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자유가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지요. 결국 ‘0'의 위상을 지닌 인식불가능성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바로 그 체계와 구조의 결핍이자 내재적 간극이 터져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이럴 때 구조와 체계가 갖는 충격이란 외상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아무리 치료해서 원상태로 돌리려고 해도,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불가능성이 우리 사회구조의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혁명적 이론의 구조적 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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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숫자'0'의 경우 수의 규칙과 배열에 대해 가능조건인(수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체계를 중지시키는 인식불가능성인 불가능조건으로서, 가능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조건임을 의미하는 존재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과론의 사슬chain 혹은 그물을 찢고나오는 자유라는 우연적 행위가 인식불가능성, 혹은 예측불가능성이라는 체계의 불가능조건임에는 확실하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자유가 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인지 생각해봅시다.


예측과 통제는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측불가능성과 통제는 서로의 작동을 어렵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유와 통제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통제에 있어서 자유를 온전하게 지배할 수 있다면, 자유라는 것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요? 단순히 제거해 버릴 수 있으면 불가능조건도 될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인데요. 그러나 자유에 대한 통제가 최대한의 상태라고 가정했을 때에도, 자유는 억압될 수 있을 뿐 제거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자유는 그 자신이 부자유할 수 있는, 통제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까지 그 자신의 선택범위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때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주체란 가장 구속되어있을 경우에도 제거될 수 없는 자유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유의 가능성은 온전하게 통제할 때에도 제거될 수 없으며, 동시에 통제될 자유는 오히려 통제를 가능하게 해주기도 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를 통제에 대한 가능조건인 동시에 통제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맷변환_제거되지 않는 우연성과 자유.jpg

 

지금까지 우리는 숫자'0'과 자유를 통해 '인식론적 불가능성이 존재론적 조건이다'라는 혁명적 이론의 위상구조를 지시해주는 언명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혁명적인 이론에 있어 구조적 위상을 공유하는, 질문이라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 공가능성
 공가능성은 공집합의 장소와 함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공집합이 없으면 집합이 닫히지 않지만(가능조건), 그런데 공집합이란 집합의 요소로는 설명되지 않기에, 공집합은 집합의 요소로 드러나지 않는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집합이 온전히 자신의 요소로 흡수하여 지배하지 못하게 하지요. (불가능조건) 결국 집합은 자신의 요소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 아닌 부분으로서 공집합{ }이라는 분신을 포함할 때에만 집합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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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문이라는 ()가능성

 


……문이란 무엇인가? 대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질문이 질문 자신이 되는 순간은 언제이며 그러한 단락의 지점은 어디인가? 실재적인 질문 혹은 물음이란 대답될 수 없는 장소에서 발생하는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정해져 있다면, 단순히 지식의 순차적 나열이라 말할 수 있을 뿐, 그것을 질문이나 물음이라고 할 이유는 없다.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질문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실재적인 질문이 드러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체계 속에서 질문이라는 불가능성이 드러나는 지점은, 마치 결핍이 없는 온전한 전체인 것처럼 봉합되었던 체계 혹은 구조의 틈새가 내부적으로 파열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이라는 불가능성은 체계 자체를 내파시키는 불가능한 대답을 요청한다. (질문 자체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으로서만 가능하기에 질문 스스로가 대답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체계 안에서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이라는 불가능성이 외양한다는 것은 체계 자체가 결핍되어있으며, 온전하다고 가정되었던 기존 사회체계가 불가능해지는 단락 혹은 중지의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질문이라는 공가능성은 드러남으로서 체계를 불가능하게 하며, 사라짐으로서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조건인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체계는 스스로가 이러한 불가능성으로서의 질문에 마치 대답이 가능한 필연적인 것처럼 스스로를 제시하는 제스처를 통해서만 성립된다.


그렇다면 체계 속에 주어져 있는 질문과 대답의 악무한이라는 강요된 선택 속에서 오늘날 자유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모색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질문과 대답의 악무한을 꿰뚫고 나가는 질문 그 자체로서의 질문이 그러한 장소일 것이다. 질문 그 자체라고 함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질문이자, 동시에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서 질문 속에서 질문을 넘어서는, 질문에 내재한 결핍을 지시하고 외양하게 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의 가능성은 주어진 질문과 대답의 악무한 속에서 질문을 두 번 선택할 때에 드러나기에, 또한 타자에게 선택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으로 끌어안기 위해서 강요된 선택을 다시 한 번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선택은 질문과 대답의 악무한이 마치 결핍이 없는 온전한 체계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텅 빈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질문과 대답의 원환 속에서 질문에 대한 선택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질문이라는 잉여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질문을 두 번 선택하기. 그렇기에 질문에 대한 두 번째 선택에서 드러나는 불가능한 질문은 기존 원환 속의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서 질문이 질문 자신이 되게 하는, 질문과 질문 사이에 있는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대답될 수 없는 질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이라는 불가능성은 사회 속에서 지배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빈-공간으로 드러남으로서 사회구조 자체를 재편하게 하며, 사라짐으로서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불)가능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질문이라는 불가능성은 사회체계가 설명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체계 바깥의 빈-공간이지만, 그러한 불가능성이 사회 속에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안에 있는 바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체계의 안과 밖이 같아지는 불가능한 공간이 체계 내부에서 외양한다는 것은, 사회체계를 유지시켜주는 안과 밖이라는 경계가 붕괴하는 동시에 구조 자체가 내파된다는 것을 지시한다. 때문에 사회는 이러한 혼돈으로서의 질문, 빈 공간으로서의 질문과 그 불확정성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위해 다양한 지식을 통해 빈 공간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질문의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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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과 대답의 악순환과 대립구조
 고등학생 때 우리가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왜 공부하지?’라고 물어봤을 때, 보통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라고 이야기하지요. 삶을 윤택하게 살기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라는 대답에도 왜라고 말한다면,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왜? 라는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보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보통은 사회에서 정해져 있는 대답이 우리의 대답을 대체하게 되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까요. 그것은 기존에 정해져있는 질문과 대답의 악순환으로는 대답될 수 없는 부분까지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질문과 대답의 기존구조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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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왜 기존에 주어진 대답과 질문이라는 순환구도 자체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경우가 많을까요? 보통은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가지요. 저도 그러는 편이 훨씬 속편하기도 하구요.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라면 이후의 결과들에 대해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나 의존할 수 있는 예외적인 대상이 사라지게 되어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자기 자신이 껴안을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불가능한 질문에는 불가능한 대답, 그 질문 자신이 대답 자체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기 때문이지요. 주말에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한 친구가 어떤 영화를 보자고 해서 봤는데, 엄청나게 재미도 없고 느낌도 없다면 그 친구에게 네가 선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지요. 자신의 동의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처럼 그 친구에게 밥을 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예로는 병든 망나니 아들이 거부하는 치료법을 부모가 권해서 그러한 치료법을 선택하여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망나니 아들은 그 치료법을 자식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할 수 있는 행동하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질문이라는 책임 -만약 그것이 자유로운 결단이라면 그 결단에 온전히 책임져야하기에- 을 외면하고 싶기에 질문을 던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혹은 그러기 위해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기도 하지요.


여하튼 사회에서 정해주지 않은 질문을 요청하는 경우, 그리고 그러한 질문이 대답될 경우에 기존 사회의 구조체계가 지배할 수 없는 빈-공간 혹은 틈새가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기존 사회체계의 안정성이 파괴되는 지점에서 재-편의 가능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 안에 있는 바깥
 질서가 통용되는 공간을 내부라고 한다면, 사회체계의 질서가 작동하지 않게 되는 공간을 외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안에 있는 바깥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부의 질서를 중지시키는 불가능성이 내부에서부터 파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윗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사회체계의 안과 밖이 같아지는 불가능한 공간이 체계 내부에서 외양한다는 것은, 사회체계를 유지시켜주는 안과 밖이라는 경계가 붕괴하는 동시에 구조 자체가 내파된다는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견고하게 만들어놓은 요새에 수류탄을 던져 넣는다고 하더라도, 요새 안에서 밖으로 다시 쳐낼 수 있고 적이 외부에 있기에 어떤 전략을 가지고 행동하는지 관찰할 수 있지만, 요새 내부의 적군이 심장부에서 폭탄을 터뜨려 내파시키는 것은 요새 자체를 붕괴시키는 내파적인 위력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2. 질문의 장소는 어디인가?


“우리가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기체는 생존하도록 진화되지만 적응하기위해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롭게 출현하는 질서는 자신의 환경을 재-창조(정립)한다.”


학교정을 걸으면서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축물은 평화의 전당이나 본관이 아닌(중앙도서관의 원형열람실이 매력적이지만)문화세계창조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오벨리스크 형식의 교시탑이다. 탑에 쓰여 있듯이 경희대학의 교시는 문화세계창조이다. 창조는 기존구조로부터의 자유가 그 자신의 전제조건으로서, 다시 말해서 불가능한 질문과 자유의 가능성 창조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사회체계가 불가능한 질문의 가능성이 요구되지 않는 온전한 권력으로서 주어져 작동하고 있다면, 기존의 가치체계를 그대로 적용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허용된 자유는 적용할 자유에 다름이 아니며, 창조에의 추구나 질문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까지 사회는 온전하기보다 내부적인 결핍을 가지고 있었으며, 야만적 문명이 스스로를 야만적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사회의 결핍을 가리고 질문과 재-편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가치체계를 온전한 것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적용하도록 권장해왔다. 오히려 내부의 결핍이 드러날 경우 내적 결핍을 희생양에게 투사하고,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사회 내부를 정화시켜온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지금보다 좀더 나은 사회를 바란다면, 기존의 사회체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한 질문이 요구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불가능한 질문을 구성할 수 있어야 기존의 사회체계가 온전히 지배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서 실재적(불가능한) 행위가 발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 안에서 불가능한 질문이 드러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어디인가? 대학이야말로 그러한 질문의 위상을 지닌 장소일 수 있지 않을까.




2.1. 내재적 간극과 극소차이, 그리고 변혁의 가능성

학은 기존 사회체계의 구조에 구성요소를 보충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재-구조화 기능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사회체계와 극소차이를 포함하는 구성원을 사회에 보충하는 것을 통해 사회를 내부적으로 환치하는 재-구조화 기능을 지닌다. 마치 문에 달려있는 경첩처럼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동시에 단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은 사회에 구성원을 보충‧연결한다는 점에서 사회를 유지하게하는 가능조건이자 사회 내부에 극소차이를 기입함으로서 사회를 환치시킨다는 점에서 기존 사회체계를 중지시키는 불가능조건이며, 그렇기에 불가능조건인 동시에 가능조건인 제거할 수 없는 존재조건으로서의 질문의 위상과 일치한다. 아마도 그러한 극소차이가 가능한 것은 질문이라는 자기-반성적과정을 그중핵으로 포함하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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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소차이를 통한 내부적인 환치

 대학은 기존의 사회체계구조에 적합한 구성요소를 보충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체계의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기관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가정과 학교, 종교 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혹은 헤게모니 장악도구라고도 부르지요. 가장 핵심적인 기관 중 하나가 바로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사회화 혹은 주체화를 통해 사회의 구성원을 보충해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사회체계의 구조에 적합한 구성원들을 보충함으로서 사회구조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회체계의 구조에 적합하지 않는 최대차이를 가진 이들, 기존의 사회구조에 저항하려는 이들은 배제되거나 억압되게 됩니다. 이러한 구별과 통제를 통해 사회체계의 안정성을 유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존의 사회체계와 극소차이를 포함하는 구성원을 사회에 보충하게 되면, 그러한 최소차이를 품고있는 구성원들은 사회 내부에서 그 구성요소들을 환치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시말해서 적인지 친구인지 구별불가능한 최소차이를 품은 구성원들을 사회 내부에 공급함으로서 사회를 내부적으로 재-구조화하는 결과를 얻게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보충과 환치의 과정은 보환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는 합니다.


이러한 보환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차이는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질문 자신에 대한 질문이 가능한 것처럼 질문은 그 자체로 자기-반성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신의 수축처럼, 자기 자신의 결핍과 조우할 수 있는 자기-반성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질문의 위상이 질문과 질문 자신이라는 최소차이(자유)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권력이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과 질문은 기존의 질문과 대답이라는 원환의 선로에서 탈선시키는 최소차이로서의 틈새를 열게 합니다. 이렇듯 최소차이로서의 질문은 자유의 최소조건이기도 합니다. 제거될 수 없는 자유가 사회구조의 통제에 있어서 가능조건이자 불가능조건이었듯이, 질문이라는 최소차이도 드러남으로서 사회구조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며, 사라짐으로서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능조건으로서 같은 위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연꽃(불가능성)은 흙탕물인 연못(사회구조) 속에 피어서 연못을 정화시켜주어서 여러 가지 물고기들과 식물들(다양성)이 연못에서 살 수 있게도 해주며, 동시에 연꽃은 깨끗한 물에서는 살지 않기에 연못의 생태계를 가능하게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다시금 연못이 흙탕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잊어버릴 수 있겠지요. 질문이라는 (불)가능성은 이렇게 연꽃과 같은 것입니다.

 



과적으로 대학은 사회의 내재적 간극으로서의 질문을 외양시킬 수 있는 공간이며, 그러한 질문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게끔 하는 신체 없는 기관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학은 자기-반성적, 비판적, 성찰적 사유를 배양하며, 이미 항상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기에 잠재성으로 남아있는 불가능한 질문의 가능성과 자유의 가능성 그리고 창조의 가능성이 외양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대학 안에서 질문의 가능성이 외양하는 것을 가장 대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체계에 대한 재-구조화와 창조 그리고 자유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으로서 대학에서부터 그 질문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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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 없는 기관
☞ 신체가 통제할 수 없는 기관으로서 신체에서 잘려나간 부분이지만 살아서 남아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이 많이 나오는데, 여동생의 잘린 혀가 왕의 죄를 언니에게 말한다든지, 팔에서 절단된 손이나 홀로 춤추는 다리들은 무언가 두려운 낯설음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부분이지만, 통제를 벗어난 부분 아닌 부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팔이 통제를 벗어나서 우리들을 마구 때린다고 상상해봤을 때, 단순히 누군가가 우리를 가격하는 상황보다 훨씬 경악스럽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일부분이지만, 통제를 벗어난 ‘부분 아닌 부분’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대상이 보이지 않기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까이 자신 안에 있기에 더욱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한 부분이 타인의 부분이라도 경악스러울 것 같은데 그러한 파편화된 대상이 나의 일부분이며 심장과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요. 다시말해서 신체 없는 기관이란, 우리 신체(사회구조)의 기관에 속해있지만 신체의 통제를 벗어난 부분(자유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대학사회의 현재와 오래된 미래


『 대학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귀를 따갑게 한다. 인문학의 위기, 학생운동의 침체, 취업학원화, 정체성 상실…. 건전한 비판의식을 지닌 교양인을 길러내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깊이 성찰하는 대학의 기능이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는 현상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구제금융 체제와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그 상실의 속도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위 내용은 1999년 05월 13일 ‘위기의 대학, 낡은 틀을 깬다.’라는 제목으로 한겨레21에 실린 기사의 첫 단락이다. 기사는 11년 전에 작성된 내용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늘날 대학의 모습과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현재도 자발적인 취업학원화, 학생사회의 파편화, 인문학에 대한 대학 내외의 온도차, 정신적 상업주의인 전문주의, 정체성 상실…, 당시에는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진행되었던 문제들이 이제는 대학사회가 능동적으로 반지성의 공간이 되길 떠맡아 경제적 이익과 권위만을 추구하며 그러한 문제들을 악화시키고 있다. 11년 전에 대학이 죽어가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대학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날 대학은 죽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학은 이전부터 죽어있었다. 다만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마도 대학이 죽은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그러한 분열의 순간에 죽어있는 동시에 살아있는 유령의 공동체로서, 그 대학적인 자유의 가능성을 폭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 - - - - - - - - - - - - - 다음 2화에서 이어집니다. (3.1. 두 개의 논리, 하나의 이면) - - - - - - - - - - - - - - -

댓글
2010.10.04 07:29:54
識者無識

글 작성시 스크랩트 실행오류가 자꾸 뜨는데 왜 그런지 미치겠군요.  스크립트도 최소화한 듯한데... 

글상자도 계속 겹치고 완전 힘들었네요ㅎ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댓글달아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스크립트의 한도를 맞추느라 오타가 계속 나는군요;;

댓글
2010.10.05 09:38:10
brown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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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와 참모 직종에 관심있는 학우들 보세요! ^^ (1)
꼬공♡
20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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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文化] 질문이라는 장소 2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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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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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꼬공씨의 칼럼
<자기소개서 작성법> 관련 오프모임을 가져볼까해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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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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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꼬공씨의 칼럼
미국 명문 MBA 입학에세이 작성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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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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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역전이란 바로 이런것!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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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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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OP MBA로 가는 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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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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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독서토론] 공지 & 책소개입니다. (8)
꼬공♡
201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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