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0

 

 

 

 

                                                                                                                                                                                  

 

안녕하세요, 식자무식입니다.

또다시 명령어 오류가 났군요.

위 이미지들은 본문에 첨부된 것인데, 글을 다시 작성해도 계속 저렇게 위로 올라가네요.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시는데는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죄송합니다... ㅠㅠ

 

                                                                                                                                                                                

 

 

 

 

 

  

안녕하세요. 식자무식입니다.  


대학문화 같럼도 이제 2화에 접어들었는데요, 1화 연재 시에 웹스크랩트(명령어) 과잉오류로, 글이 게시된 뒤 수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HTML편집기로 명령어들을 수정하는 와중에 텍스트의 문장과 글자들이 빠진 상태로 글이 올라가게 되어서, 글이 등록된 후 1시간여동안 게시물을 보신 분들께 불편함을 드린 것 같아서 죄송스런 마음이 듭니다. 당시에 1화를 열람해주신 처음 20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대학문화 칼럼 처음에 난항을 겪은 것에 가슴이 아프군요... 개인적인 건강문제로 연재가 늦어지는 것도 죄송스럽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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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화는 첫 화에 이어서 '3.1. 두 개의 논리, 하나의 이면' 부분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대학가에서 통용되는 두 가지 논리(경영논리와 다양성논리)가 실제로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논리가 통용되는 대학교육에서 제공하는 지식의 종류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두 가지 논리가 궁핍해지는 곤궁의 지점이 어떤 지점인지, 그리고 그러한 궁핍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볼 것입니다.  더불어 실재적 지식과 질문 그리고 행위가 어떤 관계 속에서 추동되는지 그 궤적을 따라가 볼 것입니다. 글의 초반부이기에 복잡한 내용같지만 단어를 하나하나 음미해가시면서 읽으신다면, 순간적으로 전체를 능가하는 부분과 마주치실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자 대학문화 칼럼 2화로 들어가볼까요?

 

 

 


식자무식 大學文化(대학문화) 칼럼

10월 2일    목   

질문이라는 장소 -대학적인 질문을 위하여-

0. 숫자0의 위상에 대하여
1. 질문이라는 (불)가능성
2. 질문의 장소는 어디인가?
     2.1. 내재적 간극과 극소차이, 그리고 변혁의 가능성
3. 대학사회의 현재와 오래된 미래 
     3.1. 두 개의 논리, 하나의 이면
     3.2. 두 개의 지식, 이중의 곤궁
          3.2.1. 제3의 지식과 자기-반성성
          3.2.2. 질문의 자기-분열 : 이중의 곤궁에서 시작하기


 

 

 


3.1 두 개의 논리, 하나의 이면

 


국 교육부장관이 한국의 대학을 본받자고 주장할 정도로, 최근 대학가에 불고 있는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구조조정 현상은 ‘학과 통폐합 혹은 폐과’라는 적나라한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중앙대의 경우, “18개 단과대학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해 놓은 상태에선 대학의 형평성 논리에 밀려 연구와 교육, 선택과 집중을 통한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할 수 없다”는 박범훈이라는 총장의 발언에서, 오늘날 대학 운영의 목표와 초점이 경쟁력 강화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경쟁력 강화인가? 중앙대처럼 선택과 집중이라는 경쟁논리에서 배재된 기초학문 학과들의 통폐합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본을 투자할 만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 학과들을 강화시키는 선택과 집중, 그리고 경제적 가치가 적은 학과들의 배제라는 경영논리는 오늘날 대학 운영에 있어서 일종의 코드로 성립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운영논리의 결과는 당장의 경제적 수치로만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오히려 교육정책이 부정적인 결과로 드러나는 시기는, 이미 수만명의 학생들이 그 정책을 거쳐서 졸업한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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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상자]

 

경영논리로서의 대학교육

 

☞ 다시말해서 이러한 대학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체계의 수월성을 얼마나 작동시킬 것인가에 따라 학과의 경쟁력을 판단하여 그러한 기준에서 검증되지 않았거나 경제적 가치가 적다고 판단되는 학과들을 배제하고, 경쟁논리에 적합한 학과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대학의 경쟁력을 키우고 자본주의 가치체계에 부합하는 경쟁논리가 내면화된 기능적 전문인으로서 재학생들을 양성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통해 기능적 전문인은 배출할 수 있겠지만 기존의 사회체계를 보충하는 동시에 재-구성할 수 있게하는 질문의 가능성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배제되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대학은 사회에서 다음 그림과 같은 역할밖에는 수행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이러한 대학 교과과정을 통해 구성원이 보충된 사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런 사회는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일까요.. 

 

 

  대학 교과과정의 경영논리로의 동질화.gif                    대학의 자본주의적 사회보충.gif

 

 

                                                                                                                                                                                

 

 

  

와 같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배제라는 대학운영의 코드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희대의 경우, 최근 학과사업지원이라는 각 학과별 예산지원 프로그램을 10월부터 실행할 예정으로서, 학과의 특수성과 다양성, 전문성 향상 등에 있어서 효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학과의 특수화만을 장려하는 것은 경제원칙에 충실한 선택과 집중 그리고 배제를 통한 동질화라는 경영논리의 위험성과 그 근본에 있어선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학문의 특수화는 동시에 학문의 개별적 파편화를 함께 가지고 오며, 또한 기존의 전문주의와 권력화라는 분과학문의 규율논리는 특수화를 통한 지식권력의 축적과 그로인한 내적인 동질화가 가져오는 비판적 사고의 마비 등의 문제에 대해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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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학문은 학문의 대상을 고정시키고, 계승할 지적 전통, 제기할 질문의 허용여부, 탐구할 대상, 축적할 지식 내용, 지식탐구의 방법론 등을 결정하며, 다른 분과와 구분하는 경계를 설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과간의 경계들을 가로지르거나 기존의 한정되어버린 지적 틀에서 다루어질 수 없었던 질문이 드러나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경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사전에 방지하는 규율권력으로 작동하기 쉽다. 또한 이러한 규율권력은 현재 분과학문의 내부적 구조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타자와의 이분법적인 구별을 통해서, 기존의 내부적 구조와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에 대해 색을 칠하는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내적 비판을 질식시킬 가능성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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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분과학문 내에서 질문이 사라지고 죽은 지식들만이 학문의 탐구대상이 된다고 했을 때, 그러한 지식 틀을 깨려는 질문은 분과학문이라는 기존에 주어진 권위화된 지적 틀에 의해 고정화될 수 있다. 그렇게 권위화된 커리큘럼이 가동되고 있을 때, 교수와 학생, 동료들 간에 괜히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볼 때 학문의 특수화는 단순히 탐구 영역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적 특수화와 규율의 효과를 생산하는 원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혹시 대학 내부의 인문학의 위기와 대학 외부의 인문학 르네상스라는 대비되는 상황도 자유정신이며 자기-반성성이라는 질문으로서의 인문학적 정신을 상실하고, 훈고적 인문주의와 분과학문이라는 학문의 규율적인 특수화에 매몰된 결과가 아닐는지. 이제는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어떤 인문학인가를 이야기해야한다. 권위의 근거는 지식이 아닌 질문이라는 자기-반성성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날 대학 외부의 인문학 르네상스마저도 제도교육에서 질문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는 것의 영향으로 그 동력이 상대적으로 감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에 인문학이 자기 자신이 인문학임을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러한 죽음을 스스로에게 선언하는 인문학의 지적운동으로서 근본적인 자기-성찰을 요구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포맷변환_규율논리, 특수화와 파편화, 자기동일화.jpg

 

↓       

 

                                                                            포맷변환_지식권력과 규율효과1.jpg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이러한 두 개의 논리를 통해 생산되는 지식들이 기존의 사회체계에 대한 재공고화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정작 이러한 논리들이 공고화하는 사회체계 자체와 그들 자신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그들 자신과 그들이 공고화하는 사회체계가 온전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3.2 두 개의 지식, 이중의 곤궁

      3.2.1 제3의 지식과 자기-반성성

      3.2.2 질문의 자기-분열 : 이중의 곤궁에서 시작하기

 
  

렇다면 지배적인 생산양식에 부합하는 학과에 대한 선택과 집중, 그리고 질문의 배재라는 경영논리와 특수화와 개별화라는 규율논리에 갇혀있는 질문의 가능성을 드러나게 할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문제는 특수화에 의한 개별적 파편화와 그로인한 내적인 동질화라는 규율논리와 배제를 통한 경제원칙에의 동질화라는 경영논리, 둘 모두를 궁핍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가능하기 위해 경영논리와 규율논리 둘 모두가 배제해야만 하는 것은 어떤 것이고, 그 둘이 도달하는 곤궁의 지점은 어디인가. (아마도 그것은 자기-반성성이라는 질문의 지점이 아닌가?) 먼저 대학과정이 교육과정의 정점에서 사회체계에 대한 재-구조화와 그것의 지식생산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떤 지식을 생산하고 전달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포맷변환_질문의 배제를 통한 내적 동질화.jpg                        포맷변환_경영논리와 규율논리 둘다의 결핍.jpg
 

 


지식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인 상상적 지식,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지식인 현실적 지식(혹은 작동적, 상징적), 그리고 질문을 구성할 수 있게 하는 공부의 가능조건으로서 주체적 지식 혹은 실재적 지식이 있다. 주체적 지식 혹은 실재적 지식의 경우, 고유의 자리를 갖지 않으며 상상적 지식과 작동적 지식의 두 가지 시선이 교차하는 시차 위에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실재적 지식은 제3의 지식인 동시에 숫자‘0’의 층위에 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작동적 지식의 시선에서 실재적 지식은 상상적 지식과 겹쳐있는 영역으로 단순히 질문에 대한 지식처럼 보이며, 상상적 지식의 시선에서 실재적 지식은 작동적 지식과 겹쳐있는 영역으로 질문에 대한 질문(나이브하지만.. ‘어째서 질문만 하고 행위하지 않는가?’)에 행동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지식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적 지식만의 특이성은 단순히 질문에 대한 지식 또는 질문에 대한 질문에의 단순한 대답으로서의 행동을 야기하는 지식이 아니라 두 가지 시선이 교차하며 단락이 발생하는 결핍의 지점에서, 질문 속에서 질문을 넘어서는 질문 그 자체로서의 실재적 질문을 구성하는 자기-반성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반성성은 실재적 지식이 포함하고 있는 특이성으로서 바로 실재적 질문을 구성할 수 있는 공부를 가능하게 하는 실재적인 중핵이다. 그렇기에 실재적 질문과 실재적 지식은 자신의 특이성으로 자기-반성성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스스로의 결핍을 드러내는 불가능한 질문을 떠맡으는 자기-반성성을 포함하고 있는 실재적 지식이야말로 대학적인 지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포맷변환_작동적 지식과 상상적 지식, 시차적 지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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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상자]

 

단락 

☞ 평행으로 달리고 있는 두 개의 대립적인 전선 중 하나가 안으로 휘어져(de-railed) 다른 하나와 겹치면서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전격(spark)으로 인해 회로 자체가 중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누전현상이나 퓨즈가 타버리는 것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위의 문장에서는 작동적 지식과 상상적 지식 둘 모두를 궁핍하게 하는 이중 결핍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락이란 연속성(질서) 속에 불연속성(중지)을 초래하는 결핍의 지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예로 닫혀있는 원모양의 구조를 생각해봅시다. 호를 따라 이어지던 경계선이 점진적으로 구심력이 강해짐에 따라 아주 미세한 각도로 안으로 휘어지게 되면, 경계선은 마치 블랙홀처럼 나선모양으로 휘어져 구조 자체를 붕괴시켜 버리게 되지요. 이렇게 선 자신과 만나게 되는 경우를 또한 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재적 질문과 실재적 지식

☞ 실재적 질문은 불가능성으로서의 질문 혹은 근본적인 질문, 두 번째 질문과 같은 동의어입니다. 다시말해서 구조 자체가 내부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결핍을 드러내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조는 사회일 수도 있고 법일 수도 있으며 국가나 대학 혹은 사상체계일 수도 있습니다. 질문에 대한 질문은 질문 속에서 질문을 넘어서는 질문으로서, 질문에 내재한 결핍을 외양하게 하는 불가능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생각해보았듯이 질문 자체가 질문되는 것 자체의 결폅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질문에 대한 질문은 질문의 자기-분열로서

(1) 질문을 질문이게 하는 질문 그 자체(질문 속에서 질문을 넘어서는 질문)이자

(2) '어째서 질문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이브한 대답으로서의 단순한 행동이 아닌, 질문 그 자체라는 과잉으로서의 질문(1)을 자신의 중핵으로 품고 있는 행위

(1 and 2)를 추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재적 지식이란 불가능한 질문에 대한 지식으로서, 실재적인 질문들을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있어야 질문이 가능하고 한편으로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그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때문에, 질문과 지식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라는 물음과 흡사합니다. 이렇듯 실재적 지식은 실재적 질문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실재적 질문을 구성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실재적 질문도 실재적 지식을 구성하는 원인인 동시에 실재적 지식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로서 지식체계 자체의 한계 속에서 터져나오는 파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질문과 지식은 인과론적인 구별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질문의 효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일 텐데요. (가위바위보를 생각하시면 전달이 쉬울 것 같습니다. 가위<바위, 바위<보, 보<가위라는 관계에서처럼 지식과 질문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지점에서는 질문이 먼저인가 지식이 먼저인가라는 이항선택이 불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판적이고 정합적인 지식이라도 실재적 질문(의 가능성)을 폐제하는 지식의 양태는 실재적 지식이 될 수 없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이렇듯 인과론과 대립구조가 궁핍해지는 지점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필연성과 자기동일적 논리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인 동시에 필연성이 거울을 보며 손으로 스스로 가리키는 동시에 자신을 우연성의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며, 자유가 필연성을 절개하며 내부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전체는 자기 자신이 불가능해지는 빈-공간을 중핵으로 포함하는 비-전체의 형태로만 가능하기 때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실재적 질문과 지식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핍까지도 드러내는 자기-반성성(불가능성이라는 자-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질문의 내부에 포함된 외부로서(안에 있는 바깥) 질문이 질문 자신과 만나는 내재적 분열을 지시하며, 질문을 질문 자체이게 하는 다시 말해서 제거될 수 없는 구성적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어떤 면에서 질문 자체는 자기-반성성 그 자체입니다. 질문에 대한 질문이라는 개념처럼 자기-반성성은 질문이 그 자신의 중핵으로서 품고 있는 특이성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도 신의 분열에서처럼 이러한 자기-반성성을 자신의 중핵으로 포함한 질문(실재적 혹은 두 번째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제거될 수 없는 자유의 존재론적 위상임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상적 지식과 작동적 지식

☞ 상상적 지식과 작동적 지식은 실재적 질문과의 대면을 회피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적 지식의 경우 자신의 체계가 불가능해지는 결핍의 틈새를 드러내는 실재적 질문을 봉합해버리며, 자신의 체계가 계속 온전하다고 믿는다고 상상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지식의 영역에서 제기하는 질문을 상상적 질문이라고 하며, 이는 잠재적인 형태로는 유사하지만 과거 속에서 미래를 열어젖히는 (역사적) 상상력 혹은 현실 속에서 가능성의 공간을 구성해내는 상상력과는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꿈속에 죽은 아버지가 나타나 현실에서처럼 무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의 유령이 이미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 마치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스스로가 그렇게 믿게 됩니다. 여기서 아버지(체계)가 이미 죽어있었다는 지식을 실재적 지식이라고 한다면, 마치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믿는 지식을 상상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상상적 지식 때문에 계속해서 죽은 아버지가 영향력을 갖게 되어 그 효과로서 작동되는 지식이 바로 작동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져있다고 가정되는 대답과 질문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나가는 두 번째 질문처럼, 상상적 질문(에 대한 지식)은 자신이 궁핍해지는 결핍의 지점에서 던져지는 불가능성으로서의 질문이라는 존재조건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단지 상상적 지식은 자신을 궁핍하게하는 결핍으로서의 질문이 마치 온전히 봉합되었다는 믿음을 믿는 것을 통해 잠정적으로 억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질문이 지식체계의 연쇄를 끊어내는 것인 동시에 지식을 가능하게하는 조건이 바로 질문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파열은 상상적 지식 그 자신이 가진 상상력의 양가성(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허상의 유지와 환상의 자기-파괴)으로인해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에는 질문이 질문 자신이 되는 지점에서 실재적 질문은 상상적 질문에 대한 지식의 봉합을 찢어버리며 터져 나오게 되지요. 이러한 질문을, 질문에 대한 질문, 두 번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번째 질문은 두 가지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근본적인 양상은 질문 속에서 질문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면서, 질문이 자신의 한계지점까지 나아가 자신을 산산히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의 양상 중 하나는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관한 것으로 실재적이며 근본적인 질문을 구성할 수 있게하는 질문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질문에 대한 질문은 복잡한 의학문제를 푸는데 지독한 치통 때문에 문제를 더 이상 해결하지 못한다면, 복잡한 문제보다 지독한 치통이라는 통증부터 치유해야하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두 번째 질문의 다른 양상은 ‘어째서 질문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가?’ 혹은 ‘문제제기만하고 사회 속에서 문제 자체가 되려고 하지 않는가?’와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치아가 문제인지 확인했음에도, 치료를 계속해서 연기하는 상황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활동과 행동이 다르고, 행위와 활동이 다르기에, 행위와 활동이 물리적 행동이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점은 중요합니다. 오히려 행동의 차원이 그 자신에게도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너무나 가벼운 동시에 그렇기에 너무나 무거워 재어지지 않는 질문의 무게를 재는 것이 중요할 것이지요.


작동적 지식은 질문에 대한 질문의 첫 번째 양상이 억압된 결과로서, 어떤 질문인지는 관계가 없으며 그 질문이나 지식이 현실에서 얼마나 잘 작동되는가에 해당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지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보통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지식들이 작동적 지식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작동적 지식도 상상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그러나 이렇듯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마다 강박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사회 '자체'의 결핍을 드러내거나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박적으로 사회에서 드러나는 결핍들을 메꾸는 것을 통해 사회 자체를 더욱 온전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마치 운명에 거역하기 위해 어려가지 조치를 취하지만, 결국 그러한 조치들 때문에 운명이 필연적이게 되는 쇼처럼 말입니다.


근본적인 질문이 억압된 상태에서의 여러 가지 행동들은 그것이 아무리 적극적인 양상을 띠더라고 현실이 처한 교착상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손쉽게 보이는 해결책들은 일시적인 미봉책이 될 수는 있겠지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지요. 때문에 이러한 강박적인 행동들은 결국에는 파국으로 치닫거나, 근본적인 질문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7~18세기 조선에서 신분제 혁파라는 세계사적 화두를 과격한 질문이라고 외면하고 노비제 및 신분제에 대한 부분적 조치와 후생강화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시도들은 미봉책이었을 뿐, 시대혁파의 기획은 계속해서 연기되었으며 결국 사후적인 동학혁명과 1910년 조선의 망국으로 결착되었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편, 동시에 행동의 적극성은 근본적인 질문과의 조우를 최대한 연기하기 위해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 ‘브라질’에는 이러한 행동의 양상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위공무원은 여러 가지 민원들을 해결하기위해 부처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다닙니다. 일요일에도 나와서 누가보아도 굉장히 열정적으로 움직이지요. 그러나 해결되는 민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 위해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작동적 지식은 실재적인 질문과의 만남을 회피하기 위해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들로서 제시된 행동들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희대의 경우, 학과 간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학과지원사업은 지식생산에 있어서의 풍부함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지식의 다양화와 그로 인한 풍부함이 경영논리로의 통폐합에서 고려되지 않고 배제되는 질문을 구성할 수 있는 실재적 지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질문을 구성할 수 없으면, 죽어있는 나르시시즘적인 지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기존 사회구조에 종속된 부품으로서의 지식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서 질문의 영역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화·특수화로 인해 개별화된 지식들의 중핵을 가로지를 수 있는 질문으로서의 누빔점(쇼파 가운데에 쿠션을 고정시키는 교차점)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포맷변환_질문으로서의 누빔점.jpg 포맷변환_지식의 중핵을 가로지르는 질문1.jpg

 

 

 

재적 질문이 구성되는 경우, 질문의 자기-분열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전개된다. 실재적 질문은 질문만 있고 행동이 없는 동시에, 행동만 있고 질문이 없는 상황 속에서 요청된다. 그러나 질문의 자기-분열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러한 실재적 질문이 실재적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구성적 원인으로서, 자신이 실재적 질문이 아닐 가능성을 끌어안고 고민과 책임감을 지니는 자기-반성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재적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서 드러나는 실재적 행위도 자기-반성성을 그 중핵으로 품고 있다.) 이럴 때야 실재적 지식은 실재적 질문을 구성하게 하는 가능조건이자 그 추동력인 자기-반성성을 그 중핵으로 포함하고 있는 지식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질문은 자기-반성성을 포함하는 질문으로서, 질문이 질문 자신의 결핍과 대면하게 하는 자기-반성성 그자체 혹은 자기-반성성의 외양을 가능하게 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실재적 지식은 행동이 없는 행동과 질문이 없는 질문이 만나는 지점(이중의 부재), 그리고 결핍된 질문과 결핍된 행동이 만나는(이중의 결핍) -같지만 다른, 하나이자 둘인- 이중의 곤궁에서 요청되는 질문과 질문 그 자체의 단락(실재적 질문과 실재적 질문 그 자체=실재적 행위, 이러한 변화는 그 중핵으로서의 자기-반성성을 포함한다)을 구성하는 지식이라고 할 있다. 결과적으로, 실재적 질문 (그자체)는 자신의 특이성인 자기-반성성 (그자체)이며, 실재적 지식의 구성적 원인이자 결과물로서의 자기-반성성을 자신의 필요충분조건으로 포함하고 있는 질문인 것이다. 즉 실재적 질문과 실재적 지식의 중핵은 자기-반성성이며, 이러한 자기-분열을 포함하고 있을 때 지식이 먼저인가, 질문이 먼저인가라는 이항대립적인 선택이 중지된다.

 


 

 결핍 없는 질문과 결핍 없는 행동.jpg                 포맷변환_결핍된 질문과 결핍된 행동, 이중 결핍.jpg

 

 

 

 

 포맷변환_실재적 지식과 질문의 구성적 조건2.jpg  

 



※ 결과적으로 실재적 지식, 실재적 질문, 실재적 행위라는 세 가지 위상은 자기-반성성이자 자기-부정성이 변신을 통해 외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자기-부정성은 외양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다르게 말해서 자기-부정성은 실재적 지식과 실재적 질문, 그리고 실재적 행위를 그 자신으로서 가능하게 하는 구성적 조건이다. 더불어 자기-부정성은 자기 내부의 한 가운데에 외래적 신체가 기입된 '안인 동시에 바깥'과 같은 형식으로서의 제거될 수 없는 자유와 같은 위상을 같는다. 때문에 자기-부정성이 결핍이 없는 초월적 실체나 온전한 내재성과 같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기-부정성은 오히려 결핍이 없는 그러한 온전한 초월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이미 자신의 한 가운데에 자기-부정성이라는 결핍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결핍 자체이다.

 

 

 

 

간단히 말해서 불가능한 질문이란 자신 속에서 결핍을 드러내는 동시에 결핍 그 자체가 되려는 자기-부정성으로서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존의 사회체계가 감지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극소차이로서의 질문이 가능하며, 체계의 사슬이 중지되는 결핍의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질문은 자신의 존재조건으로서 질문이라는 자기-부정성에 의해 단순히 사회 속에 질문을 제기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질문 그 자체가 되려는 질문의 영역에서 넘쳐나오는 질문에의 과잉된 결핍으로서의 질문에 대한 질문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서 ‘질문에 대한 질문의 과정에 있어서 질문 자신의 결핍을 외양시킬 수 있는 자기-부정성을 포함하고 있는가? 어째서 질문만 하고 행위하지 않는가?’(유사-행동에의 중지를 포함하여.. 활동과 행동이 다르고, 행위와 활동이 다르다는 점은 중요하다)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과잉된 반복으로서의 질문은, 질문이지만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질문’으로서, 질문이라는 전체를 능가하는 부분 아닌 부분으로서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질문의 자기-분열은 질문이라는 극소차이를 포함하는 주체의 실재적 행위추동시킨다.

 

 

 

                                                                                                                                                                                

 

00e40a55-583b-48db-bb4e-dccb6ce9e4db_jpg_large.jpg

[물음표상자]

 

 과잉된 결핍

☞ 과잉된 결핍이란 전체가 통제 혹은 제어불가능한 부분 아닌 부분으로서, 부분이지만 전체를 능가(과잉)하는 결핍을 일컫는 것입니다. 부분 아닌 부분의 예로는 국가와 국민(인민)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는데요. 인민(국민)은 국가를 건립하는 동시에 국민(인민)으로서 국가에 의해 정체성을 부여받습니다. 다시말해 인민은 국가의 부분(국민)이지만 국가를 능가하는 부분(인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국 이러한 과잉의 존재는 대상이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기에 결핍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상 자체에 결핍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자유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게시물의 맨위에 자기멋대로 올라가있는 이미지들도 이러한 부분 아닌 부분, 글쓴이를 당황하게만드는 과잉으로서 글쓴이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실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러한 과정은 질문이 가지고 있는 자기-반성성에 의해 추동되고 만족되는 것인데, 문제는 질문에 있어서 자신의 특이성인 자기-반성성이 없다면 질문이라는 행동이 없는 질문과 질문이 없는 유사-행동으로 침잠할 뿐이라는 것이다. 질문이라는 활동이 없다면 질문은 상상적 지식과 다를 바 없으며, 행동에 있어서 질문이 없다면 단순히 기존의 사회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위반적 움직임으로 그칠 수 있다. 그렇기에 질문이라는 활동이 없는 질문만 있는 동시에, 행동만 있고 질문이 없는 상황에서는 질문에 대한 과잉된 결핍으로서 자기-부정성을 포함하는 실재적 질문다시 한번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질문에 대해 질문한다고 해서 단순한 행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질문이 과잉으로서의 질문 혹은 과잉된 결핍으로서의 질문(중핵을 꿰뚫을 수 있는 질문:자기-반성성을 포함하는 결핍된 질문⇨ 실재적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서의 행위로의 도약(과잉으로서의 질문을 포함하는 행동:자기-반성성을 포함하는 결핍된 행동⇨ 실재적 행위이자 실재적 질문 그 자체)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의 자기 분열.jpg



 

 

- - - - - - - - - - - - - - 다음 3화에서 이어집니다. '3.3. 최소차이로서의 종속과 적응 (혹은 재-구성)' - - - - - - - - - - - - -

댓글
2010.10.31 13:20:48
cooki

어렵지만 깊이있고 참 좋은내용이네요

감사합니다.

댓글
2010.11.24 11:18:48
識者無識

연재가 자꾸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몸이 안좋아서 하루가 끝나고 집에오면 오래 앉아있지 못해서 계속 늦어졌네요.. 중간고사 끝나고 열심히 물음표와 그림들을 마저 그려서 이제는 꾸준하게 글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먹듯이 제 글도 맛있는 음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아 그리고 가독성을 높이기위해 1화와 2화에 물음표 상자 내용을 좀더 추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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